*도서명 : 종교에세이 <깨뜨려진 옥항>

*지은이 : 심 평 식

*발행처 : 한솜미디어

*쪽   수 : 280쪽 

*판   형 : 신A5(신국판) /반양장

*정   가 : 12,000원

*출판일 : 2013년 5월 15일    <홈으로 가기>

*ISBN   : 978-89-5959-357-6 03810

 이 책은?

신이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혼곤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종교 에세이집
 
인간의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정제해 주는 종교는 참된 삶의 길라잡이가 그 몫이다.
그 몫의 객체이면서 또한 주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종교인이 많은 것 같다.
비좁은 천당의 비자와 열쇠를 쥔 양 순박한 신도들을 유인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과의 친구다운 존재가 종교다. 스스로 자학하면서 믿는 종교는 인간을 위한 종교일 수 없다.
신격(神格)의 종교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정녕 참된 종교인은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한 신앙을 갖는 일이다.
 
종말론은 창조론의 소산이다. 창조가 있어야 종말이 있어서다.
달리 말하면 창조론이 생색의 변용이라면 종말론은 협박의 변용이다.
창조론에 따르면 창조 없는 존재는 없다.
 
천지를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누가 창조했을까? 신은 무시(無視)의 존재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에 어떻게 존재하게 됐을까?
 
원시적인 사고력밖에 없었던 유목과 농업시대에 뜻밖에 들이닥친 홍수·바람·지진 등의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일 때 입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오 하느님(Oh my God)’은
인간 무능력의 한계를 달래는 마음의 소리였고
그 소리가 가슴에 터를 잡으면서 신은 만들어졌다.
 
본서는 지은이가 말년에 여친에게 못다 한 자신의 뜻을 담은 종교 이야기이다.
종교의 총정리의 글이라고 보면 어떨까해서 일독을 권한 본다.
 
  책속으로... 
 
세계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를 안겨준 것은 종교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다. 그 트라우마(trauma) 중심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대종을 차지하고 있다. 예서부터 거슬러 지구 역사 3,000년 가운데 전쟁이 없는 평화는 300년뿐이고, 나머지 2,700년은 전쟁의 역사였다. 그 전쟁의 역사 중 종교가 주체이거나 끼인 전쟁은 90% 안팎이라고 한 사학자는 주장했다.
 
지상의 싸움꾼 두 신들 간의 헤비급 타이틀 매치인 십자군 전쟁도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싸움이었다. 이 싸움은 동유럽과 중근동을 오가며,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200년간 지속됐다. 헤비급 타이틀은 ‘예루살렘’이었고, 당시 타이틀 보유자는 이슬람권의 셀주크투르크였다. 기독교 본산지 예루살렘에 나부끼는 투르크의 깃발은 그리스도교엔 눈엣가시였음에 틀림없다.
 
기독교의 성도(聖都)인 예루살렘은 세계 기독교의 배꼽(omphalos)으로 여기는 신도들에게는 평생 한 번 가보기를 염원하는 성지순례지다. 예수가 수난의 피를 흘린 골고다 언덕길은 꿈에라도 걸어 보고픈 신심의 길이기에 그렇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세우고 가꾼 기독교의 중심 성지 아닌가! 그러나 서유럽과 비잔틴제국에게는 예루살렘의 성지순례마저도 간섭받고 있었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권의 손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간에 벌어진 십자군 전쟁을 살펴보자(『이야기 세계사』, 김경문 외 2인).
 
10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 제국의 동부로 이동하여 이슬람교도가 된 셀주크투르크(터키)가 세력을 키웠다. 11세기 중엽에 바그다드(이라크)를 점령한 후 실권을 장악하고 파죽지세로 예루살렘을 비롯한 시리아, 소아시아의 요충지를 잇따라 점령하고, 1071년 지금의 터키 동부에서 비잔틴제국(동로마) 군까지 격파하고 있었다. 비잔틴제국은 1054년 동·서 교회 간 분열로 로마교황청과 소원하게 지내고 있었으나, 다급해진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체면 불구하고 로마교황청에 SOS를 구했다.
 
이슬람 세력의 확산·횡포를 막는 일과 위축된 기독교의 피폐와 성지순례의 고난을 해결하자는 애처로운 호소가 SOS에 담겨 있었다. 이 요청을 받은 로마교황청 교황 우르반 2세는 꿈이 있었다. 그동안 서로 떨떠름한 관계도 훌훌 털고 싶었고, 서로마 교회와 비잔틴의 중심인 동로마 교회(동방교회)의 재결합을 이뤄 동방에 강력한 교회 국가도 창설하고, 서유럽 여러 국민의 대량 이민 유치도 하고 싶은 복안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이처럼 다목적 정책을 한꺼번에 실현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시점에서 비잔틴제국 황제가 대규모의 지원군 파견 계획을 전제하면서 이슬람의 점령지 예루살렘을 탈환하자고 교황 우르반 2세에게 프러포즈를 해온 거다.
 
우르반 2세는 그렇지 않아도 ‘성직자 임명권’을 놓고 황제와의 갈등으로 골치를 끓이고 있을 때라, 알렉시우스 1세의 프러포즈는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준 터가 됐다.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요청은 교황 우르반 2세에게는 기다리던 단비였다. 교황 쪽에 유리한 헤게모니를 쥘 기회와 서유럽 봉건사회의 폐단이었던 제후와 기사 사이의 고조된 사적인 알력까지도 ‘신(神)의 평화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맞아떨어진 거다. 동상이몽이 서로 물때를 만난 셈이다.
 
마침내 우르반 교황은 1095년 11월 프랑스 클레르 공의회에서 역사적인 열변을 토한다.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는 십자군 전쟁이야말로 여호와의 본령을 복구하는 성지 회복 전쟁이다. 이 성전(聖戰)에서 승리하면 동방에 널려 있는 금은보화 모두의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이라고 세속 제후들을 들쑤셨고, “죽으면 천국에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원래 우르반 2세 교황은 열변가로 통했다. 감격한 참석자들은 모두 외쳤다고 한다. “여호와는 전쟁을 원하신다. 우리의 뒤를 지켜줄 거다.”
 
교황의 뒤를 이어 많은 열성 성직자들이 곳곳을 다니면서 십자군 참가를 독려했고, 교회세의 확장으로 커진 유럽의 거대한 힘과 강렬한 신앙심이 결합하여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은 활활 타올랐다.
‘십자’ 견장이 성스럽게 빛나는 십자군은 사기충천, 보무도 당당했고 십자깃발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제1차 십자군 중 선발대는 프랑스에서 긁어모은 볼품없는 기사와 무지한 농민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이었다. 이들은 별 준비도 없이 십자깃발 하나만 믿고 도나우 강을 건너 발칸반도를 지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아시아로 넘어갔다. 무지한 십자군은 행군 도중 약탈을 자행하여 많은 비난을 받는 등 무절제와 무질서로 조직력을 잃은 터라 투르크군과의 전투에서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반 2세가 구성한 정규 십자군은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 국왕의 형제들과 당대 유명한 기사들이 참가했다. 기병 5천, 보병 1만 5천 정도였다. 하지만 당초 공격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예루살렘 공격에는 병력이 당초 계획보다 3분의 1정도가 줄어들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인 안티옥(시리아)을 연합 공격키로 한 비잔틴(동로마)군이 제멋대로 철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전쟁을 발기한 알렉시우스 1세의 군대로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돌출 행동이었다.
 
난감한 십자군은 이탈리아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2개월에 걸친 격전 끝에 겨우 승리했다. 안티옥을 점령한 십자군은 비잔탄군의 도움 없이 유럽의 힘만으로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을 1099년에 탈환하였다. 예루살렘을 셀주크투르크에게 잃은 지 28년 만에 되찾았다. 그러나 성군(聖軍)답지 않게 십자군 내부에 안티옥 전쟁의 승리를 놓고 자중지란이 일어났다.
북프랑스파에서는 승리의 주역은 보에몽 기사의 용맹으로 치켜세웠고, 남프랑스파에서는 레이몽 기사의 휘하 바르톨로메오가 내륙의 사막에서 주운 성창(聖槍)의 기적 때문이라고 맞섰다. 이런 반목은 예루살렘으로 진군 도중에도 계속됐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무사 바르톨로메오는 성창의 위력을 실제 보여주고 싶었다. 그 무사는 셔츠 한 벌만 입은 채 문제의 성창만을 손에 들고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천천히 걸어 넘었다. 그 결과 그는 12일 만에 죽었다.
 
죽음을 놓고도 두 진영에서는 입싸움이 계속됐다. 반대파에서는 사망원인을 화상 때문이라고 했고, 성창의 위력을 보여주려고 했던 남프랑스파에서는 군중들이 기쁨에 들떠 그를 한 번이라도 만져 보려다가 밟아 죽인 거라고 우겼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15세기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때 일어난 잔 다르크의 성검(聖劍) 사건이다. 프랑스 시골처녀 잔 다르크는 여호와의 계시를 받고 들판에서 주운 성검으로 진두에 서서 영국군을 무찌른 성녀였으나 종교재판에서 거짓 증언죄(주운 성검은 거짓)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이 재판을 두고 종교적 갈등이 심했다. 약 300년 앞에 일어난 바르톨로메오의 성창 사건도 대립이 심각했다. 성창 기사 바르톨로메오가 죽은 무렵에 마라 성의 학살이 발생했다.
프랑스 보에몽 기사가 지휘한 십자군이 마라 성을 공략하여 이슬람 주민을 모조리 학살했다. ‘제1차 십자군 전쟁 기록사’에 등재된 필자 미상의 기록을 보자(『이야기 세계사』, 김경문 등 2명 편저).
 
이하생략
- <본문>서 발췌
 이 책의 차례
 
머리말 _ 004
 
PARTⅠ _ 여호와의 로고스(말씀)
1. 천지창조와 페르시아 신화 _ 015
2. 노아의 방주와 수메르 홍수 신화 _ 026
3. 출애굽에서 예루살렘까지 _ 031
4. 모세 평전(評傳) _ 038
5.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폼페이 _ 051
 
PART Ⅱ _ 이스라엘 선대민족은 어디에서 왔는가?
1. 힉소스와 헤브라이 _ 059
2. 아브라함의 가계보와 일본 천황 _ 065
3.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_ 070
4. ‘요셉’ 드라마 _ 079
 
PART Ⅲ _ 누가 여호와를 간섭하는가?
1. 드러낸 여호와의 모습 _ 089
2. 신의 성정 _ 097
3. 유일신의 고난과 재앙 _ 118
4. 자성과 개혁 _ 131
 
PART Ⅳ _ 여호와신과 알라신의 대결
1. 제1·2차 십자군 전쟁 리포트 _ 141
2. 제3차 십자군 전쟁 리포트 _ 153
3. 제4차 십자군 전쟁 리포트 _ 160
4. 소년 십자군 전쟁의 내막 _ 164
5. 제5~8차 십자군 전쟁 리포트 _ 167
 
PART Ⅴ _ 누가 종교를 훼손시키는가?
1. 신의 본질과 왕따당한 학자들 _ 175
2. 목회자의 몫 _ 189
3. 교리의 원형질 _ 195
4. 네거티브 설교 _ 199
5. 원로 목사의 입말 _ 207
6. 교리와 속담 _ 211
7. 종말론과 구원 _ 215
 
PART Ⅵ _ 돌이켜본 종교
1. 도덕과 종교 그리고 개혁 _ 221
2. 정교의 동행과 역행 _ 233
3. 민족주의와 종교 _ 244
4. 종교 비교론 _ 249
5. 바이블의 티 _ 255
6. 가난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_ 266
7. 종교의 박해·공과(功過)·자성 _ 271
 
끝맺는 말 _ 278

 지은이 소개

지은이 _ 심평식
 
1938년 전남 여수 출생
광주고·전남대 경제학과 졸업
국가공무원 서기관·건설교통부 부가 작사 공모전 당선
자전적 소설 『녹지 않는 눈길』 출간
직원 수필집 『삶의 언저리』 등 7권 편집 주관
공무원 서화전 서양화 부문 연 5회 입선
서울상록미전·서울아그모전 등 30여 회
개인전 1회(광주남봉갤러리)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레핀 미술대학교 연수 및 교류전
 
황혼에 물든 저녁놀이 곱다지만
나에게는 허망스레 느껴질 뿐이다.
늘그막에 만나 한때를 같이했던 사람과
함께 빚었던 옥항마저 깨뜨린 게 다는 아니겠지만
내 종교관 때문이라고 자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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